그리고 데스2

데스(death) 2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구?
단순해
사랑하면 돼.
그러면 내 유전자 1/2은 영원히 살 수 있지.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야.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이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의 유전자 1/2이 꼭 필요하지.
당신이 사랑하는 내 몸은 껍질이야.
소중한 유전자가 보여주는 마술이지.
이기적 유전자는 절대 죽지 않아.
심지어
공룡의 유전자도 내 몸에 있는 걸.
이타적인 행동은 없어.
그렇게 해석할 뿐이지.
모든 것은 당신의 유전자 1/2을 얻기 위한 설계지.
모른척해야 해.

우아하게 열정을 갖고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해.

예쁜아이

팬지가 올해도 폈다.
교차로 회전 차로에
누군가가 물을 주고 간다.
그리고 소녀가 울고 있다.
그 팬지가 부러워서
저렇게 길가의 예쁜 꽃이고 싶었던 나는
특별하고 싶지 않았다.
신 이준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 뿐
넌 어떻게 그렇게 예쁘니 라고 물어오면
그래 난 원래 예뻐 대답하고
난 손가락조차 예쁘게 움직여야 했다.
토끼무늬그려진 하얀타이즈
멜빵 스커트에 미니 가방
어린 시절 한 번도 바지를 입지 못했다.

시절회상

밖에 눈이 무릎까지 왔다는
어릴 적 엄마의 잠 깨움과
창 넘어 들리던 넉가래 소리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다.

여름방학 하는 날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집에 오는 길
큰 잣나무껍질에 송진 묻혀
저수지에 띄웠다.
파동은 무지갯빛으로 물 위에 반사되며
작은 배가 되어 호수로 나아갔다.

방과 후 친구 집을 찾던 골목길은
미로처럼 연결되어 – 문방구 지나
국숫집을 지나 세탁소를 지나
나와 놀던 친구가 깜짝 놀라 반기우고
우리의 설렘은 저녁밥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하나둘 사라졌다.

1984년 7월 여름일기

수업이 중간쯤 ― 비가 얼마나 오던지
교실이 어두컴컴해지고
빨리 엄마 있는 집 가고 싶은 그런 날
엄마는 부침개는 해 놓으셨을 거다.
우산을 주러 학교를 오시겠지.
역시나 엄마는 노란 우산을 들고
사슴같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신다.
그렇게 우산만 두고 가셨고 친구와 둘이서
한 개 우산속에 어깨를 부비며 걸었다.
신작로 웅덩이에서 고인 빗물로
퐁당퐁당 장난치다
뒤 종아리 하얀 타이즈에
얼룩덜룩 흙탕물이 튀었다.
우산은 어디 가고 가방도 교과서도 다 젖어버렸다.
우리보다 수십 배 키가 컸던 미루나무 사이로
내 좋아하는 코스모스들이 줄지어 피어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그렇게 걷고 걸으며
집 오는 시간은 다른 날보다도 훨씬 더 늦었다.

스머프 마을

그 해는 소나기 무던히도 자주 내렸어.
노란 우산 속 초등 소녀였지.
작은 동네 마을은 우리에겐 온 세상이었어.
엄마는 아니 우리 엄마는 소낙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갖고 오셨고 그 아이는 혼자 남았어.
우린 금세 단짝이 되었지 ― 비가 오면
나는 엄마 손이 아닌 그 친구 손을 잡고 집에갔지.
그땐 왜 몰랐을까―그 애 엄마가 왜 올 수 없는지를
얼마 후 마을에 장례식이 있었지.
예측했겠지만 단짝 친구의 엄마였어.
그 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었어.
그 애는 달라졌어 ―

그 친구에게
난 그저 엄마 있는 행운아일 뿐
어떤 위로의 말도 뒤틀리는 언어였고
감정 매트리스의 프레임은 굴곡 되었다.

소녀시대

삼청동 담벼락이 높다.
어딘가 새어 나오는 수다들
소담스레 비추어 주는
가로등을 뒤로하고 걸어 보던 우리
지난 시절의
너와 난 아주 작은 소녀들이었네.
밤샘 공부하러 시장 거리 지하 반 층에 있던
너의 방을 왕래하면서 커다란 대접에 끓여 먹던 커피
잠을 쫓기 위해 칫솔에 가득 묻히던 치약
그때의 기억들이 사십 대 세월을
아름다운 색실로 교차해
다양한 무늬로 빛나는구나.
계절이 오고 갔지.
겨울이 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잔디밭에 누워 반짝이는
태양 아래 깔깔거리며 즐기던 우리

어느새인가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밤에 어둠을 쫓아내며 각자 열심이었고
너의 지난날의 그 구석진 방과
핑크빛 짙은 세상 ―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네.

젊은날

중간고사 끝난
5월 아니 6월이었던가!
하얀 클로버꽃 만발한 잔디밭
대학 기숙사 붉은 벽돌담
햇살 아래 펄럭이는 롱 주름치마 풀밭을 덮고
두꺼운 원서 두어 페이지 멋으로 읽는다.
힐끗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는
어깨 넓은 체형의 투명인간들
안 보는 척 실눈 사이로 파고드는
사각 캔버스에는 초록이 번지고
엿보듯 멋쩍게 인사하며
스치는 남학생들의 시큼한 땀 냄새
교정 운동장 한가운데서 들리는
체육과 학생들의 열어젖힌 성대
나팔처럼 울리는 굵은 파동 소리

대학가파전집

일요일 아침
비가 왔어.
장맛비였나 참 많이 퍼붓던 여름날
카카오톡이 와 있었어.
안녕이라고 인사하기엔 어색한 시간 ― 3년만인가!
오랜만에 아이들과 들렸던 엄마 집
내 살던 시골 마을 커피집에서 만났네.
커피 볶는 소리보다 더 시끄러웠던 장터 손님들
덕분에 어색함도 낯설음도 금세 사라지고
무슨 이야기들이 그리 많았을까
마치 서로 못 만난 이유를 변명이나 하듯이
당신의 첫마디 ― 당신은 변한 것이 없군요!
시간은 정직하게 멈추지 않았고
이대로 일어서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알았어.
우리 오늘 또 만날까… 난 망설이지 않았지. 네!
우린 어둠이 내려앉을 때 대학가에서
다시 만났어. ―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
파전에 달콤새콤 막걸리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더 맛있었던 지짐과 술잔 가득히 넘치도록
설레고 좋은 마음만큼 비 님은 계속 내렸고
노란 주전자에서 잔 채우는 소리
비속에 쏟아 내는 이야기 소리
몇 번째 주전자부터인가 ― 하얀 기억뿐

메멘토

침대에서 눈을 뜨자 ― 익숙한 내 공간이 어색했어.
시간 이동이라도 한 듯
덜 깬 알코올이 남아있는 내 몸은
어제 그 자리에 있는 듯했어

신기하고 두근거리는 이 마음은 뭔지 모르겠지만
분명 무슨 일이 생겼던 거야 ― 기억은 없지만.

출근길에 아메리카노를 진하게 마시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카톡을 보냈지.
―저 고고씽 하고 있어요.―

오후, 당신에게서 늦은 답장이 왔어
자기가 먼저 입 맞춘 것 기억해!
헐 ― 장난하지 마세요!

여름이 그렇게 싱그럽게 다가왔네.
새벽 ― 산허리 아래 내려앉은 안개처럼

아침전병시장

2012년 춥던 그해 겨울아침
가죽장갑을 꼈는데도 손은 시렸다.
아침 일곱 시쯤 시장은 이미 한낮의 느낌
부침개 굽고 택배 포장하고 김은 모락모락
고소한 들기름 냄새
택배 아저씨 급하다 소리 지르는 성깔
밖이 춥든지 말든지 껄껄 웃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어제 봤다고 반갑다 먼저 인사 건네는 전병 엄마들
배추 몇 잎 얹어 따끈따끈 부침
접시에 둘둘 말아 주신다.
간장한종 재기―생전 먹어나 봤나
배추 냄새 난다고 엄마한테 투덜대던 어린 시절
각종 야채들이 들어가 특별한 맛을 주는 메밀전병
시장 안 그 허름한 의자에 앉아 먹으란다.
순간 당황하며 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르신 살인미소에 젓가락을 들고 한입 깨물어본다.
뭔 맛이래!―한 접시를 다비어며
환갑 넘으신 어르신과 한참을 이야길 나누고 있다.
프림 잘 섞인 커피 한 잔으로
자연스레 그들과 이웃이 되었다.
내 하이힐 또각거리는 소리에 아침 시장이 열린다.